헛된 희망으로 괴로움을 안겨주는 행위를 ‘희망 고문’이라고 합니다. 희망 고문에 기대를 품고 있다가 견디다 못하면 멘붕(멘탈 붕괴)에 빠집니다. 만약에 멘붕에 빠지지 않고 계속해서 유지하려면 지속적인 멘탈 관리로 정신승리(본인에게 불리하거나 나쁜 상황을 좋은 상황이라고 자기 위안을 하는 행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그 소망의 근거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근거 없는 정신승리는 망상에 불과하고, 더 큰 멘붕으로 이어집니다.
요한복음 5장에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자신의 병을 고쳐보겠다고 희망 고문을 하며 기다리고 있는 병자들이 나옵니다. 그들의 소망의 근거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전설입니다. 신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의지한 것으로 전혀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중에 한 사람, 가장 절망적이고, 오래되고, 설령 물이 움직인다 해도 먼저 물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을 찾아가셔서 전설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그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 기록된 세 번째 예수님의 표적입니다.
1)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헛된 소망으로 희망 고문당하고 있는 사람들 – 성전 양문(羊門) 곁에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는 벧(집)과 헤세드(자비)의 합성어로 ‘자비의 집’이란 의미입니다. 여기에 행각 다섯이 있었고, 행각마다 많은 병자들이 누워서 전설에 내려오는 물이 움직이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소문은 사실도 아닐뿐더러,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아주 잔혹하고 살벌한 경쟁에서 오직 한 사람만 승리하는 무자비한 현장입니다. 평소에는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며 함께 정신승리하는 곳이지만, 물이 움직이는 순간 서로 제일 먼저 들어가겠다고 다투는 전쟁터가 되어버립니다. 이름은 자비의 집(베데스다)이었지만, 자비가 없는 곳입니다.
2) 자비 없는 자비의 집에 찾아가시는 자비의 주님 – 자비란 아무런 힘과 능력과 실력과 자격이 없어도 은택을 입는 것인데, 치열한 경쟁에서 한 사람만 살아남는 곳이 되었습니다. 자비는 고사하고 가장 불공정한 곳입니다. 가장 치유가 덜 필요한, 가장 거동이 자유롭고 재빠른 사람만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무자비한 곳에 자비의 주님이 찾아가십니다. 주님의 시선은 가장 자비가 필요한 38년 된 병자에게 집중됩니다.
3) 주님을 만날 때, 얻게 되는 치유의 자비 – 이 표적은 병자가 먼저 낫기를 요청하여 일어난 표적이 아닙니다. 주님이 먼저 찾아가서 만나주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주님과 병자의 만남과 대화를 보면 동문서답 같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도 비상식적으로 보입니다. 낫고 싶으니 거기에 있겠지요. 38년 된 병자의 대답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낫고자 하는지 아닌지, 예 아니오로 한 대답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만 토해냅니다. 물이 움직일 때 재빨리 물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는 것, 더 멀쩡한 사람이 먼저 내려가는 것을 토로하며 아직 고침 받지 못한 원인이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하는 원망과 불평입니다. 주님은 헛된 전설에 의지한 소망이 아니라, 능력의 말씀으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아들 하나님이 말씀으로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자비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자비와 능력을 힘입어 회복과 치유가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