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서 반드시 거룩해지거나 실수나 허물이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늘 실수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가 많습니다. 다행인 것은 우리가 연약하여 실수하고 죄에 넘어져도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게 대해주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 사랑 변찮고 날 지키시며 어제나 오늘이 한결같네’라고 고백한 찬송가 가사처럼 한결같이 변함없는 사랑으로 인도하십니다. 문제는 우리도 한결같이 실수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신실하지 못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묵상하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못한 자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삶의 거처를 옮깁니다. 네게브 땅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 땅으로 내려가 거류하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누이라 하면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아내로 삼기 위해 데려갔습니다. 이러한 일은 창세기 12장에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도 동일하게 있었던 일이고, 26장에 그의 아들 이삭에게서 데자뷰처럼 반복되어 일어납니다. 자기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넘겨주는 일을 지켜 보고만 있어야 할 처참한 상황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의 허물은 반복될 것이고, 자녀에게도 재현될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어려움에 처하자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개입하셔서 아브라함의 가정을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개입하시는 방법은 재앙을 내리시거나 꿈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아비멜렉의 꿈에 자신을 계시하시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크게 높여주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신실하심은 우리의 상식을 초월합니다. 7절에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살겠다고 아내를 누이라 속여 다른 남자에게 보내는 자를 하나님은 선지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랄 왕의 생사가 하나님의 선지자 아브라함의 기도 여하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기도할 때, 그들이 죽지 않음은 물론이고, 그동안 닫혀 있었던 태의 문이 열리는 치유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인간의 실수나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 효력이나 은혜가 상실되지 않음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열국의 아비와 어미가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아비멜렉에게 가서 그의 자녀를 낳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에 큰 차질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아브라함처럼 삶의 거처를 옮겨야만 할 것 같고, 살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술수를 써야만 할 것 같은 상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아브라함도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여 다시 일어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