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이 여행을 하던 중 멋진 풍경이 내다보이는 곳에 있는 호텔에 묵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을 상상하며 행복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습니다. 새벽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잠이 깨어 방안을 살피는데, 탁자 위에 두었던 사과 한 쪽이 패어 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과를 먹은 기억이 없어서 패인 사과를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쥐가 갉아먹은 자국이었습니다. 그동안 그곳에서 보았던 기분 좋은 기억과 감정은 사라지고, 온통 쥐를 잡든지 방을 옮기든지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잃은 것은 사과 하나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쥐입니다. 쥐를 방치하면 그 방에 머무는 동안 계속 불쾌하고 불안하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근심거리와 걱정거리는 내 마음에 쥐새끼처럼 들어와 우리 삶의 한 부분을 갉아먹기 시작합니다. 이 근심의 쥐를 잡지 못하고 방치하면 이것은 우리의 감정만 갉아 먹는 것이 아니라, 평안과 감사와 기쁨과 인생을 갉아먹게 됩니다. 우리를 무력화시킬 것이고 낙심하여 절망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걱정 근심은 생쥐처럼 작고 잘 보이지 않는 미미한 존재이지만, 그것을 방치하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해결책으로 기도를 주셨습니다. 이론은 쉽지만 실천이 어려운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하겠다고 마음 먹다가도 금방 낙심하고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로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간단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라고 하셨습니다. 항상 기도하되, 어떤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고 계속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비유의 논점과 핵심이 흐릴 수 있으니 이런 관점으로 이 이야기를 해석하라는 것입니다.
비유를 일대일로 대입해보면 원한을 풀고자 하는 과부는 우리입니다. 그리고 원한을 풀어 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인 재판관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재판관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관에 비유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혹을 해소해 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적용 부분을 시작하시면서 “하물며 하나님께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 해석의 키는 단순히 일대일 대입이 아니라, 불의한 재판장도 번거롭게 계속 기도하면 들어주게 된다면, 하물며 하나님이야 택하는 자들의 밤낮 부르짖는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볼 때, 응답받기까지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이 불의한 재판관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나 자신의 기도에 대해 100% 즉각적인 응답을 확신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마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대단한 믿음의 은사입니다. 기도하면서 마음 한 켠에는 “기도해도 안 될 거야. 설마 기도한다고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이런 것까지 들어 주신다고? 내 경험상 기도해 보았지만, 응답받았다고 할 만한 일이 별로 없는데?” 이런 생각들이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에게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실 것이고, 그리 오래 참지 않고 속히 원한을 풀어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말씀으로 마무리하십니다. 기도 응답은 낙심하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믿음을 가진 자가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로 기적을 만드는 주인공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