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할 때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이 더 힘들다고 합니다. 얼핏 생각에는 내리막길이 수월하고 오르막길이 힘들 것 같은데 반대입니다. 내리막길이 심장과 폐에는 무리를 덜 주지만 무릎과 관절, 그리고 근육에는 몇 배의 큰 무리를 줍니다. 이미 체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에서 몸무게의 하중을 받으면서 무릎과 관절에 무리를 주게 됩니다. 그래서 내리막 산행에서 무릎 보호대나 등산 스틱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충분한 트레이닝이 없거나 미숙한 산행은 오히려 근육세포를 파괴하고 관절에 이상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인가 비전을 정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달려갈 때는 힘든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 긴장도 하고, 우리의 에너지와 사역이 비전을 향하기 때문에 크게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표를 이루고 한숨 돌리며 큰 어려움이 없을 때 문제가 생기기 쉽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이끄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동안 갈릴리와 주변에서 사역하시던 예수님이 대거 군중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다윗성을 바라보면서 왕이 되어 다윗 왕국을 세우실 것을 기대하며 올라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올라가시는데, 제자들은 누가 높아질 것인가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오늘 사건을 세 가지 관점에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야고보와 요한 – 마태복음 20장에는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요청한 것으로 나오지만, 내용은 같습니다. 다윗의 왕국과 같은 나라를 회복하실 때, 좌우에 앉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베드로와 함께 중요한 사건마다 예수님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잘못 배웠습니다.
2) 다른 열 제자 – 이들도 야고보와 요한의 이야기를 듣고 화를 냈다고 했습니다. 이들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동일한 욕구를 가지고 있었고, 기회가 되지 않아 요청하지 못한 것입니다. 화를 냈다는 것은 동일한 욕구가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 –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그들이 구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마시는 잔(고난)과 받는 세례(죽음)의 의미를 알려주셨습니다. 화를 내는 제자들을 보시고는 제자들을 불러 세상의 원리와 예수님의 원리가 다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세상의 권력 구조는 위로 갈수록 적은 숫자가 권력을 쥐는 피라미드구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라미드 꼭대기로 올라가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구조는 다릅니다.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범을 보이십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시는지 삶으로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욕구는 올라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올라가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려놓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주님의 제자는 높은 곳에 취하여 미친 듯이 올라가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이 내려가신 그 길로 따라 내려가는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