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신학자들이 한국교회의 설교를 분석하며 우려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교회 강단이 지나치게 위로와 축복, 행복과 성공에 맞춰있고, 회개와 심판, 지옥과 헌신에 관해 설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축복대성회’에는 참석하지만, ‘대각성집회’는 참석하려 하지 않습니다. 세상살이 힘드니 말씀으로라도 위로받고, 신경 쓸 일 많으니 쉽고 편한 설교 듣고 싶은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교회까지 와서 잘못을 지적받고, 협박처럼 들리는 심판의 설교를 들어야 할 때 불편한 것도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원하는 설교만 하는 것이 하나님께도 옳은 일이고, 성도들에게도 필요한 것일까요?
예레미야 당시 선지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하나는 심판은 없다, 이 상태로 살아도 괜찮다는 낙관론적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지금의 상태로는 심판을 면하기 어렵다. 아프지만 심판을 받아들이고 다시 시작하자는 비관론적 선지자입니다. 사람이 듣기에는 낙관론적 설교가 훨씬 편하고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아니고(23:21, 29:9), 그들이 하는 것은 백성들을 미혹하는 것임으로(14:14), 하나님이 치실 것이고(23:32), 결국 그들을 몰아내고 멸망하게 하실 것(27:15)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귀에 듣기 좋은 평안과 위로의 메시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때, 예레미야처럼 매국노 소리를 들으며 현실을 아프게 지적하는 참 선지자는 박해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11절에 보면 현실을 말씀하십니다. 뜨거운 바람이 광야에 있는 헐벗은 산에서 내 딸 백성에게 불어온다고 말씀합니다. 원래 바람은 정화나 선별을 위해 작용합니다. 오염된 공기를 바람이 불어 정화하거나 키질을 할 수 있게 하여 알곡을 골라내는 선별의 긍정적 기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뜨거운 사막의 열풍은 농작물과 식물을 말라 죽게 하고, 태풍과 같이 강한 바람은 삶의 터전을 날려버리는 부정적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낼 바람은 열풍이나 태풍과 같은 심판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1. 무책임한 낙관론보다 실상을 알게 하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 예레미야가 예언을 시작할 당시인 요시야왕 시대의 시대적 상황은 강대국 앗수르가 크게 쇠퇴했고, 오래된 강대국 애굽과 신흥 강대국 바벨론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국제정세에서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심판은 없고, 전쟁의 위협도 없다고 판단하여 평안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국제정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2.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 우리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할 때, 문제가 됩니다. 22절에 보면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인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결과는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는데는 무지하게 됩니다.
3.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 22-27절을 보면 ‘내가 본즉’이라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실 때의 질서와 생명과 풍요로움이 역행하여 창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파괴를 위한 심판이 아니라, 재창조를 위한 회복의 과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