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회에는 몇 가지 권위의 근거가 있습니다. 1) 법적권위 - 법률과 사회 시스템에 의한 권위(정치권력, 계급), 2) 전통적 권위 – 전통이나 관습에 의한 권위(연장자, 어른, 가장), 3) 도덕적 권위 – 차별화된 도덕성과 희생의 권위(부모, 독립운동가, 성자), 4) 전문가적 권위 – 특정분야의 전문가에게 부여되는 권위(학자, 전문가), 5) 카리스마적 권위 – 하나님이 은사(카리스)로 주셨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개인의 매력이나 능력에서 나오는 권위. 여기에 한 가지 더한다면 6) 영적 권위, 신적 권위를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면서 영적 권위가 나타남으로 엄청난 충격이 일어났습니다. 22절에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뭇 사람들이 그의 교훈에 놀랐다고 했고, 27절에서는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다 놀라 권위 있는 새 교훈이라고 했습니다. 특히 22절의 놀라니(헬, 엑세플렛손토)는 밖에서(엑스)와 때린다(플렛소)의 합성어로 외부로부터 강한 충격을 받아 정신이 멍하다, 넋을 잃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기존의 가치관, 신앙관, 영적 질서, 세계관이 완전히 흔들리는 상황입니다. 오늘 본문은 한 현장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난 두 개의 사건이 이어집니다.
먼저 예수님이 방금 전 제자로 부르신 네 명의 제자와 함께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 이들이 모두 강한 충격을 받을 정도로 놀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서기관들의 성경해석에서는 받지 못한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권위를 인정하는 만큼 수용합니다. 저명한 과학자가 유명한 학술지에 게재한 이론과 흔히 찌라시라고 하는 가짜 뉴스와는 받아들이는 것이 다릅니다. 말씀이 듣는 귀만 만족시키는 말장난인지, 우리에게 성경의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세상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정보가 되는지, 아니면 우리의 인생관을 바꾸어놓고, 다른 삶을 살게 만드는 권세가 있는지는 말씀의 권위에서 차이가 납니다.
이렇게 거룩한 충격과 혼란에 흔들리고 있을 때, 돌발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마침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회당에 모인 자 중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말씀을 방해하고 소리 지르고 있었습니다. 귀신 들렸다는 것은 귀신에게 통제되고 제어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귀신 앞에는 23절, 26절, 27절에 세 번이나 공통적으로 ‘더러운’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귀신이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했던 것과는 비교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회당 안에 귀신 들린 자가 있었듯이, 교회 안에도 성령의 이끄심대로 살지 못하고, 마귀의 통제 아래 제어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코로나와 같은 바이러스와 같아서 단독으로는 활동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사람을 숙주로 활동합니다. 때로는 다혈질적인 감정을, 때로는 육체의 욕망과 정욕을, 때로는 미움과 승부욕으로, 때로는 이기심과 교만함을 통해 역사합니다. 문제는 자신이 이렇게 통제되고 제어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확하게 율법의 한계, 종교의 한계, 형식적인 신앙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한국적 귀신 개념과 성경적 귀신 개념은 다릅니다. 한국적 귀신은 풀리지 않은 한이 있어 헤매고 다니는 존재로 생긴 것은 무섭게 생겼지만, 잘 달래주고 한을 풀어주면 물러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귀신은 다릅니다.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여 모습은 친근하지만, 거짓과 술수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파멸로 이끄는 실상은 두려운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우리에게는 말씀과 영적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의 권위 아래 있을 때, 우리 인생은 회복되고 온전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