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물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보이는 한 측면만 보고 융통성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의 함정은 한 측면에서는 그것이 옳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것이 전체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본질도 아니라는 것이죠. 이것을 신앙적으로 대입해 보면 우리는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알고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모를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우리를 향한 크고 비밀스러운 계획들을 가지고 계시지만, 우리는 우리 입장에서의 제한된 관점으로 보고 실망하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오늘 본문은 몇가지 낯선 상황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나병 환자의 집에 초청받아 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초대와 무관해 보이는 한 여인이 찾아와 옥합을 깨서 예수님 머리에 부었다는 것입니다. 나병 환자는 당시 부정한 인물로 여겨 접촉을 금했고, 마을에서 쫓겨나 따로 모여 살았고, 모르고 다가오는 사람이 있더라도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쳐서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거처에 예수님과 일행을 초대했다는 것은 굉장히 기이한 일입니다. 또한, 한 의문의 여인이 찾아와 아주 값비싼 향유를 부어 드린 것도 지켜보는 사람의 분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여인의 행위를 질타하며 분노한 사람들의 생각도 틀린 것 만은 아닙니다. 한 데나리온이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인 것으로 계산하면 300데나리온은 노동자 1년 연봉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그 돈이면 더 많은 사람을 먹이고 돌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한 번에 부어드린 것은 헛되이 허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예수님 살아생전 그의 장례 절차를 준비한 선지자적 행위로 행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이 여인이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것은 힘을 다하여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위를 적극 옹호하며 이 여인을 보호하셨습니다. 심지어 이 여자가 행한 일은 온 천하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전해져 그녀를 기억하게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게 됩니다.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만 알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시는 예수님은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신앙에 갇혀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감사도 하나만 아는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는 이 여인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7장에서는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계신 예수님께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져와 눈물로 발을 적시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다고 했고, 요한복음 12장에서는 이 여인이 엿새 전에 죽었다가 예수님이 살려주신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라고 소개합니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보면 이 여인은 예수님께 큰 은혜를 입은 여인입니다. 자신의 무거운 죄짐을 덜어주신 예수님, 아버지처럼 그 가정을 책임지고 있던 오라버니를 살려주신 예수님, 이렇게 남들이 알지 못하는 예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이 여인은 낭비처럼 보이는 값비싼 향유를 부어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남들이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하나밖에 모르지만, 우리는 주님과의 두 번째 비밀이 있어야 진짜 감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