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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 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은 주님께 자비를 구하는 고백입니다. 초대교회 예배 예전이 만들어질 때부터 이 자비송으로 예배를 시작했고, 지금도 가톨릭 미사에는 자비송이 첫 번째 미사곡으로 되어 있습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이 주님의 자비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것, 주님을 만나기 위해 가장 간절하고 낮은 마음으로 고백하는 것, 이것이 주님 앞에 서는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동방정교회의 수도사들은 예수기도(The Jesus Prayer,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를 반복하며 주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데 집중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한없는 자비와 긍휼을 얻었고, 더 많은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데, 정작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기 쉽습니다. 산상수훈 팔복의 다섯 번째 복이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입니다. 지금까지 네 가지 복이 내면의 내적 성품에 관한 복이라면, 나머지 네 가지 복은 그것이 밖으로 드러난 모습,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팔복의 말씀을 다시 묵상하면서 우리는 주님이 제정해주신 천국 시민으로서의 법보다는 세상의 세속적 원리에 더 익숙해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긍휼도 마찬가지입니다. 살기 힘들어지고 세상이 각박해지면 긍휼히 여기는 마음만 가지고는 살기 힘들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적자생존, 강한 자만 살아남는 정글의 법칙이 작동하는 세상에서 긍휼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손해만 보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갈등하며 고민합니다. 마음으로는 긍휼의 마음, 측은지심을 가지고 살아야지 하면서도, 막상 상황을 만나면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내 것을 챙겨야겠다는 본능이 튀어나옵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길까 말까 하는 고민과 치열한 내적 싸움이 일어납니다.

 

긍휼(矜恤)의 사전적 정의는 불쌍하고 가엾게 여겨서 도와줌입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긍휼은 히브리어 라함(자궁)에서 나온 말입니다. 자궁에 아이를 품은 어머니의 마음, 같은 태에서 나온 이들이 느끼는 감정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긍휼, 자비, 인애라는 의미로 발전하여 사용되었고, 용서의 은혜를 표현할 때 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 그리고 죄의 결말로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을 긍휼히 여기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며 치유와 기적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조건과 그에 상응하는 보상의 결과의 공식이 아닙니다. 마치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가 죄용서함이 우리가 다른 이들의 죄를 용서한 것이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님과 같습니다. 이미 우리는 죄용서함을 받았고, 일만달란트 탕감받은 자처럼 감당할 수 없는 긍휼하심을 입었기에 긍휼히 여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히 여기심이 필요합니다. 긍휼히 여김을 실천할 때, 주님께도 긍휼을 요청할 수 있는 담력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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