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힘든 상황을 만날 때, 각자가 견딜 수 있는 임계점을 설정해 놓곤 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는 힘든 일을 만나도 견뎌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그 한계상황을 넘어서도 상황이 호전되지 않거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큰 혼란에 빠지게 되고,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낙심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이런 일은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방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 다르게 나타날 수 있기에, 하나님의 본심을 깨닫기 전에는 신앙인의 고난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7개의 기적만 표적이라는 표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사건들도 있는데,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도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표적입니다.
예수님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유일하게 소망을 품을 곳이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은 멀리 계십니다. 할 수 없어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께 상황을 알리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초조하고 힘든 기다림의 시간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로에 대한 소식을 들으시고도 이틀을 더 머무르십니다. 소식을 전한 사람의 심정이나,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마르다, 마리아의 다급한 심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반응입니다. 안 가실 것처럼 시간을 끌던 예수님은 이틀 후에 갑자기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시면 제자들을 재촉하십니다. 잠든 나사로를 깨우러 가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도착하셨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어 장사지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일은 세 번 있었습니다. 시간과 장소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1 |
회당장 야이로의 딸 |
마가복음 5장, 누가복음 8장 |
죽은지 얼마 안 되어 |
집에서 |
2 |
나인성 과부의 아들 |
누가복음 7장 |
죽은지 하루 지나 |
장례행렬에서 |
3 |
나사로 |
요한복음 11장 |
죽은지 나흘이 지나 |
무덤에서 |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직전에 행하신 기적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의 절정이며, 예수님의 부활의 예표가 된 의미있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사랑하시는 가정에도 슬픔을 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소망까지 포기하고 절망하게 되는 상황으로 이끄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완전히 절망하실 때까지 기다리시고, 우리 믿음과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자리에서 소망을 실현시켜 주십니다. 그 과정에서 흔들리면 안 됩니다. 서운한 마음에 시험에 들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 믿음의 한계를 견뎌내고 이겨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절망속에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소망을 품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심을 우리에게 분명히 믿게 하십니다. 너무 쉽게 절망하지 맙시다.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맙시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음으로 따라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