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보면 일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나 모순된 결과를 가져오거나, 겉으로 보기에는 불합리하거나 부조리해 보이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역설(逆說)이라고도 하고 패러독스(paradox)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인생은 그 본질을 보고, 완성된 결과를 보아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이나 지금 현재의 상태보다 그것이 가져올 결과가 더 중요합니다.
경영의 신으로 알려진 일본 기업가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단 세 명의 직원으로 시작한 작은 회사를 세계 굴지의 기업인 파나소닉으로 키워낸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성공 비결로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 집이 몹시 가난해 어릴 적부터 구두닦이, 신문팔이 같은 고생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둘째, 태어났을 때부터 몸이 몹시 약해 항상 운동에 힘써 왔기에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셋째, 초등학교도 못 다녔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다 나의 스승으로 여기고 누구에게나 물어가며 배우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난, 병약함, 무학(無學)은 모두 단점입니다. 그러나 그 단점이 오히려 장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도 받고, 더러운 귀신에게서 고침을 받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문제가 무엇이든 예수님의 능력을 덧입어 해결함을 받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모여온 자들에게 예수님은 역설적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얼핏 들으면 논란이 생길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만나 복 받고, 능력을 힘입어 문제 해결을 받고자 나왔는데, 이런 게 예수 믿는 복이라면 예수님을 따라야 할까’하는 의구심을 품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네 개의 복과 네 개의 화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네 개의 복은 모두 ‘이게 어떻게 복이 될 수 있는가’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고, 네 개의 화는 모두 그들이 은근히 원하고 바라는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복되다고 하신 사람은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사람들에게 미움과 욕을 당하고 버림받는 자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탈피하고 싶어 하고, 주린 자는 배불리 먹고 싶어 하고, 우는 자는 눈물이 그치고 기쁨을 얻고자 하고,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자는 인기를 누리며 환영받고 싶어 합니다. 반대로 화가 있다고 한 자들은 부유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 사람의 칭찬 듣는 자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그들이 꿈꾸고 염원하는 모습입니다.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오해가 생깁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역설적 지혜입니다. 지금의 상태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가 가져올 결과를 보고 역설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난함, 주림, 울음, 배척 자체가 복이 아니라, 그것을 선용하여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밀접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면 겉모습과는 달리 그것이 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부유함, 배부름, 즐거움, 사람들의 칭찬과 인기에 취하여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데 익숙해진다면 그것이 멸망의 원인이 될 수 있기에 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도는 눈에 보이는 것에 이끌려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세상적 가치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는 말씀처럼 세상적 가치에 매몰되지 않고 하나님께 가까이함으로 참된 복을 누리는 삶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