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일을 반복해서 하다 보면 조금씩 틀려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것이 옳은 줄 알고 지속적으로 행하기 쉽습니다. 처음에는 그 차이가 얼마 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이는 점점 벌어져 나중에는 간격을 크게 벌리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주 교회에 나오고 반복적인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설령 내 신앙에 문제가 생겨도 나는 눈치채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처음에 미세한 차이가 10년, 20년, 30년 신앙생활하면서 복음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갈라디아교회는 바울이 1차 전도여행하며 세운 교회입니다.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비시디아 안디옥이 있는 곳이 갈라디아지역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세워진 교회에 바울이 떠나고 난 후, 예루살렘에서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와 바울이 전한 복음과 다른 이야기를 전했고, 갈리다아교인들은 이들의 가르침에 서서히 물들어가면서 변질된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알게 된 경위와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그리고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지를 교리적으로 설명한 후에 다시 복음으로 돌이키도록 결단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자유와 종의 멍에는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바울은 당시 노예제도를 통해 우리의 영적 상태를 설명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종의 멍에를 메고 살아갑니다. 경제적으로 빚진 자, 사회적으로 억눌린 자, 신체적으로 질병에 매인 자, 정신적으로 과거에 매인 자, 도덕적으로 욕망에 사로잡힌 자, 영적으로 죄에 속박된 자, 이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종의 특징은 무엇엔가에 얽매어 자유가 없다는 것과 스스로 종의 신분에서 자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저절로 자유가 주어지지 않기에 대신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대가를 치르시고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자유함을 얻은 자는 두 가지 극단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나는 그 자유를 통해 방종에 빠지는 것입니다. 종으로 살면서 억압되었던 자가 자유를 얻으며 하고 싶은 것을 무제한 하고 싶은 것입니다. 문제는 이 자유에 책임성이 결여되면 해서는 안 되는 것까지 하는 방종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극단은 다시 종의 상태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새로운 제도 속에 가두는 것입니다. 다시 종의 상태로 돌아가느니 스스로의 자유를 제한하더라도 어떤 제도와 시스템속에 들어가 자신을 죄로부터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교회의 문제가 이런 것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만 믿으면 죄용서함을 받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냐면서 도덕폐기론자처럼 방종에 빠지고, 죄짓는 자유를 만끽하려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율법주의라는 종교 시스템에 스스로를 가두며, 다시 율법의 종노릇하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다시 율법의 종이 되며, 율법 안에 들어오지 않는 자들을 무섭게 정죄하게 됩니다. 여기에 바울은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복음으로 자유케 된 이후에 다시 할례를 받느냐 아니냐가 아니고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 나타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극단을 조심하고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복음이 주는 자유함을 남용하여 영적 방종에 빠지는 것을 조심해야 하며, 또한 복음을 지키겠다고 다시 엄격하고 경직된 율법주의로 돌아가서도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