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평화가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은 참으로 즐거운 날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기념하며 축하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는 예수님의 탄생이지만, 신학적으로는 성육신(成肉身)입니다. 성육신(Incarnation)은 육체(car)+안에(in)+태어나는 것(natus)의 의미를 합성한 단어입니다.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된 사건이 성육신이요, 성탄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나심을 천사들은 “하나님께 영광,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찬송했습니다. 예수님의 출생에 대한 하늘의 메시지는 영광과 평화였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께는 영광이고, 우리에게는 평화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평화는 좁은 의미로는 ‘전쟁을 하지 않는 상태’이지만 현대 평화학에서는 평화를 ‘분쟁과 다툼이 없이 서로 이해하고, 우호적이며, 조화를 이루는 상태’로 이해합니다. 최근에는 이런 외적인 평화 외에도 심리적 평화, 즉 일상생활의 불확실성이 제거된 내면의 평온함도 강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외적으로 평화 없는 상태일 때가 많습니다.
끊임없이 평화를 깨뜨리는 요소들이 등장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가를 요구합니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평화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장차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자신을 주시게 됩니다.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로 인해 막힌 담을, 그리고 사람들끼리의 교만과 욕심으로 막힌 담을 허무시고, 십자가로 소멸하시어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성경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1. 역사가 누가가 본 예수님의 탄생 – 누가는 역사가 관점에서 누가복음을 기록합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시대적 배경을 상세히 소개합니다. 가이사 아구스도(Augustus)가 로마 황제인 가이사(Caesar)로 있고, 수리아의 총독으로는 구레뇨가 있을 때라고 밝힙니다. 이로서 예수님의 탄생은 역사적 사실로 오심이 천명되었습니다.
2. 역사는 가이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움직인다 – 북쪽 나사렛에 살고 있던 마리아와 요셉은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에 따라 호적(戶籍)하기 위해 남쪽 유대 땅 베들레헴까지 와서 아기 예수를 낳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출생한다는 구약의 예언(미가 5:2)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3. 세상에서는 초라하게 조용히 오셨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나심을 축하하고 축복하셨다 – 예수님은 나심부터 사람들에게 거절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출산이 임박한 마리아가 마땅한 장소를 구하지 못해 짐승과 함께 하는 곳에서 출산했습니다. 그러나 천사가 나타나 목자들을 보내어 경배하게 했고, 하늘에서는 수많은 천군과 천사가 찬송함으로 축하했습니다.
4. 누가 진짜 평화의 주인인가? - 예수님은 가이사 아구스도가 호적을 명했을 때 탄생하셨습니다. 아구스도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Gaius Octavianus)’로 쥴리어스 시저의 손자인데, 시저의 유언에 따라 양자로 입양되고 가이사의 칭호를 이어받게 됩니다. 그는 악티움 전투에서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대파하고 단독으로 권력을 차지하면서 로마의 평화(Pax Romana)로 불리는 문화적 번영기를 가져온 인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진짜 평화는 아구스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