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는 우리의 예상을 뒤엎고 의외의 결과를 나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험에 합격할 줄 알았는데 떨어지거나, 떨어질 것 같았던 사람이 합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민감한 사안의 판결이 대다수의 국민 정서와 다르게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과 판단 근거가 다를 때, 이런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핫한 노래 중에 지올 팍(Zior Park)의 CHRISTIAN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지올 팍이라는 뮤지션은 자신의 종교를 개신교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가사 전체가 영어로 되어 있고, 영상 분위기도 미국 헐리웃 영화 분위기가 나지만, 한국 사람입니다. 그 가사를 보면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하는데, “I'm still fucking christian”이라고 합니다. 크리스천은 크리스천인데 fucking christian이라는 겁니다. fucking은 ‘완전, 빌어먹을, 존×’와 같은 비속어입니다. 지올팍은 왜 이런 표현을 했을까요? 그는 이 곡을 통해서 자신도 여전히 크리스천 답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거짓된 크리스천임을 노래하며 반성합니다. 돈과 쾌락으로 물들어가고, 세속적 가치관과 성공관에 물들어가면서도, 세상 향략에 사는 건 문제없지만, 일요일 아침이면 교회에 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교회에 다니고는 있지만, 여전히 내 삶을 추적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확인해 보면 예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그런 자신을 보면서 fucking christian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신은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을 숭배하는데, 그거야말로 터무니없는 이중성과 자기모순에 빠져 사는 세상 사람들이라며 풍자합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두 사람이 대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제자공동체의 돈궤를 맡고 있었던 제자입니다. 당시 재정 전문가였던 세리 출신의 마태를 제치고 돈궤를 맡았다는 것은 셈에만 밝은 것이 아니라, 재정이 바닥나도 대처할 수 있는 융통성과 조달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과 제자들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인정받은 일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참 제자됨을 보장하고 증명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다른 평가를 하십니다.
가룟 유다와 대비되는 사람은 마리아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 있던 베다니라는 동네 나사로의 누이입니다. 11장에는 죽었던 나사로를 살려주신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오셨을 때, 예수님을 위해 집안이 잔치를 벌입니다. 마르다는 잔치를 준비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고,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다시 살아난 증인으로 잔치에 모인 사람들에게 주인공처럼 예수님과 동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돌발상황이 일어납니다.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나드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습니다. 이 향유의 값은 유다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300데나리온입니다. 노동자 1년 연봉에 해당하는 고액입니다. 이런 행위에 대한 해석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가룟 유다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누리게 해야 한다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했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유다가 그것을 팔아 많은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과정에서 훔쳐 갈 의도가 있었다고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예수님의 장례할 날을 준비한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누가 참 제자입니까? 우리는 참 제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교회에는 다니고 있지만, 내 삶의 알고리즘을 체크해 보면 예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은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