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 누군가에게 “착하다, 순하다”라고 하면 이 말은 칭찬처럼 들립니까? 아니면 흉처럼 들립니까?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나 가족이 순하고 착하다면 계속 그렇게 살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그렇게 물러터져서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으니 좀 독하고 악착같이 살라고 하겠습니까? 한 가지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착하고 순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좀처럼 지지 않고, 독하고 센 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명예를 소중히 생각하는 유대인들은 자신이 받은 수치와 모욕을 되갚아주는 것을 당연히 여겼습니다. 당하고도 대항하지 못하고, 복수하지 못한다면 남자답지 못하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명예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대항하는 것이 마땅하고,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 재앙을 비는 기도를 드려서라도 갚아주어야 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으라”는 율법을 실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은 율법의 원래 정신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 보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시면서 율법에서 “~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의 제자는 다르게 살아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얼핏 보면 문자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려운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하시면서 새로운 윤리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병행되는 율법은 “레 11:4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함을 온전함으로 승화시키셨습니다. 거룩은 “구별, 분리, 자르다”라는 의미입니다. 세상과 구별되고 분리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과 유대인이 아닌 자들을 잘라내듯 분리시켰습니다. 거룩함을 소유한 유대인들과 바리새인과 같은 특정 종파의 사람들이 이분법적인 논리로 나머지 사람들을 버림받은 집단으로 매도하였고, 유대사회에서도 내적 분열을 심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오용된 거룩의 의미를 온전함이라는 개념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온전함은 “구분, 분리가 없음”을 뜻하는 말로 차별과 제한이 없는 온전한 자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온전함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에게 비폭력 저항(38-41절)과 관용과 베풂(42절), 그리고 원수 사랑(43-48절)의 말씀을 교훈하십니다.
1) 비폭력 저항 – 오른 뺨을 치는 것은 왼손으로 때리든지 오른손 손등으로 때리는 것으로 모욕과 증오의 표현입니다. 법적 소송으로 속옷을 저당잡으려는 것은 괴롭힘과 창피를 주려는 행위입니다.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는 것은 강제부역을 시키는 것으로 억울함과 분함을 느끼게 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본능과 감정으로 대응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선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2) 관용을 베풀라 –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를 거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경제적 이익이나 상호 보상의 원리보다 더 중요한 책임과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3) 원수까지 사랑하라 – 율법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할 의무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세리나 이방인 수준의 윤리를 실천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당연히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