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도전한 생애, 윌리엄 캐리
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아직 "선교"라는 이름조차 낯설던 시절, 선교사로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고향을 떠나 낯선 이국 땅 인도에 와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한 나의 아버지,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의 말은 지금 또 복음의 다른 미 개척지 버마로 부르심을 받아 떠나는 나 펠릭스의 다짐이기도 하다.
나의 아버지 윌리암 캐리는 1761년 영국의 북 앰프턴셔(Northamptonshire) 지방 폴러스푸리(Paulerspury)라는 작은 마을에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성경을 읽어 성경의 역사적인 지식은 풍부했지만 14살이 되기 전까지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가난했기에 14살의 나이에 생계를 위해 일해야 했던 아버지는 클라크 니콜이라는 구두 수선공의 견습생이 되었다. 그 즈음 동료 견습생과의 거듭된 논쟁은 나의 아버지에게 영적인 갈등을 불러 일으켰고, 그런 과정을 통해 아버지는 구원받았다.
그후 바톤에서 설교 초청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물튼에서 목사가 되신 아버지는 탐험가인 <쿡 선장의 마지막 항해기>라는 탐험기를 읽고서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그 책은 단순히 흥미진진한 모험 이야기였으나, 나의 아버지 캐리는 그 책에서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절실한 요구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위한 부르심에 "제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했다.
그러나 극단적 칼빈주의가 만연해 있었고, 현대적 형태의 선교가 태동하지도 않은 상태였던 영국은 아직 선교에 무관심한 상태였다. 아버지가 품은 선교의 뜻에 대해 교회 지도자들은 그를 반대했고, 따라서 격려는커녕 그의 말에 귀기울이는 사람조차 없었다. 선교의 꿈이 실현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아직 서른 살도 되지 않은 구두 수선공이었던 나의 아버지는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배우고 익히는 것 외에도, 잠자는 때를 제외하고 오두막집에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였다.
도서관을 이용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여러 책들을 통해 온 세계의 대륙, 섬, 인종, 종교, 왕국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논리적으로 일반화시킨 작업의 결과로 <탐구, Enquiry>가 출간되었다.
십 년 동안 홀로 선교의 밭을 갈면서 함께한 이들이라고는 동정이나 표시하며 동참을 꺼리는 서너 명의 친구들뿐이었지만, 서서히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에 감명받은 목사들이 교회부흥과 복음전파를 위해 우선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모임을 만들자고 결의하게 되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1784년 노팅검).
이렇듯 한 사람의 마음에 굳게 자리잡은 세계 복음화의 목표를 향한 노력으로 많은 목사들이 '선교'에 도전을 받았지만, 황무지에 길을 닦는 데 어려움을 느끼자마자 그들은 그분께서 행하실 위대한 일을 기대하는 대신 곧 뒷걸음질쳤다. 하나님의 명령도 잊은 채 그들은 푸념을 늘어 놓았다. "시골 목사들이 어떻게 그토록 막중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수많은 책들을 읽고 새로운 정보들을 모으면서 세계 복음화의 목표를 구체화시켜 가던 아버지에게 하나님께서는 선교에 대해 목사들에게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이제 어렵게 선교회가 설립되자, 아직도 정부(동인도회사)의 선교사에 대한 적대감이 남아 있는 인도의 선교사로 자원하여 1793년 11월 영국을 떠난 나의 아버지는 다시는 고향을 보지 못하는 길을 떠나오게 되었다. 아버지는 인도 선교사로 임명된 순간부터, 인도를 위해서 살았다. 나태에 빠지게 하는 열대 나라 인도의 사람들은 복음을 기꺼이 듣기도 했지만, 거의 대부분 복음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두려워하고, 높은 카스트 계급은 명예를 잃을까 두려워하며, 가난한 자들은 채권자들로부터 받을 복수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또 우상숭배로 그들의 눈은 너무나 어두워져 있기도 했다.
처음 7년 동안 한 명의 인도 사람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쁨을 맛보지 못한 가운데서도 아버지는 더 효과적인 선교의 방법을 모색하고 찾았다. 그는 7,8명의 선교사들이 가족과 함께 한 저택에서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는(모라비아 선교사들의 방식대로) 선교 공동체(missionary colony)를 계획했다. 선교사들의 아내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요구되는 이 공동체는 검소하게 생활하고 일을 분할해서 할당하여 사역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그러한 생활 방식은 각자의 수입을 하나님의 사역에 그대로 드려지게 하여 선교 기금의 많은 부분을 자체적으로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회의 사역이 활성화되어 확장되자 영국에 있던 후원자들은 선교회 지원금에 부담을 느껴 삭감을 촉구하기도 했다. 주저하는 그들에게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여러분이 큰 뜻을 품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 도움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작은 뜻을 품는다면 즉시 그들의 도움도 그만큼 줄어들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에게는 특별한 동역자들이 있었다.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드려진 워드 형제와 놀랄 정도로 근면하고 성실한 마쉬만 형제였다(워드가 죽기까지 이 두 선교사는 아버지와 함께 23년 동안 동역했다). 이들의 동역으로 특히 1832년까지 40개 언어(벵갈어, 산스크리트어, 오릿아어, 마흐라타어, 힌두어, 구자라트어, 페르시크어, 텔링가어, 카르나티어, 중국어, 브라만어 등등 - 이 성경들 때문에 존속된 언어들도 있다.)로 성경을 번역할 수 있게 되었다.
식물학자나 언어학자로 알려진 나의 아버지는 정식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어떤 지위도, 영향력도 없는 한 사람의 구두 수선공에 불과했다. 또 같이 사역했던 워드는 인쇄공이었고, 마쉬만은 직조공이었다. 천한 집안에서 천하게 자란 기계공들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복음을 전파하고, 성경을 번역하여 확산시키는 일에 도구로 쓰였던 것이며, 이들은 세상 어느 곳에서 시도되거나 성취되었던 것보다 더 많은 일을 성취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하곤 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그토록 많은 종류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을 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도만 한다면 어떤 일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며,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려는 시도는커녕 자기가 맡은 일조차 꾸준하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찌 이들에게는 자신의 한계를 바라보고 정당화시키면서 안주하려는 마귀의 유혹과 공격이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이백만이 넘는 이스라엘 군대를 이끌고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을 따라 이집트에서 나온 모세처럼, 카나안 땅을 정탐하고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싸우러 가자고 담대히 말했던 칼렙처럼, 주의 구원하심을 기대하며 병기 든 자만 데리고 필리스티아 진영으로 올라간 요나단처럼, 자신의 좋은 처지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집을 지으려고 준비했던 다윗처럼, 포로의 신세로 예루살렘 재건을 위해 일했던 느헤미야처럼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했고, 하나님을 위한 위대한 일을 시도했다. 이것이 그분의 도구가 된 하나님의 사람들의 표가 아니겠는가?
8살에 인도에 온 나는 그분들의 헌신과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열매를 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했고, (나는 마쉬만과 함께 15살 때부터 거리설교에 함께했으며, 성경번역 작업에도 함께했다.) 이제는 그분의 부르심에 따라 버마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해 버마로 가고 있다.
물론 나 또한 나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분께서 나 같은 사람을 통하여 이루실 위대한 일을 기대하며 멈추지 않고 그분을 위해 수고할 것이다. 그것만이 나를 부르신 그분의 부르심에 바르게 응답하는 길임을 알기에, 그분을 신뢰하며 개척자 정신으로 다음과 같이 외칠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