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복지국가를 규정하는 척도 중 하나는 약자에 대한 배려입니다. 특히 장애인에 대한 배려와 책임이 그 사회의 성숙도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차별이나 소외됨 없도록 하고, 최대한 불편하지 않도록 시스템을 만들고, 가족에게만 책임을 넘기지 않고 사회가 함께 책임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시각장애를 딛고 유엔세계장애위원회 부의장과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차관보에 오른 강영우 박사님 같은 경우는 어릴 적 6.25 이후 남은 포탄을 잘못 가지고 놀다가 그것이 폭발하여 중도에 실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멋지게 재기에 성공하여 소망과 도전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의식을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 나옵니다. 중도에 질병이나 사고로 시력을 잃게 된 중도 실명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장애를 갖지 않은 사람은 장애의 고통을 모릅니다. 모든 활동에 제약을 받습니다. 8절 말씀처럼 기껏 할 수 있는 것이 구걸하며 걸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왜 나는 이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는가 하는 의문을 풀지 못해 좌절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힘들어도 의미가 있다면 참고 견디지만, 의미를 알 수 없는 고난은 사람을 절망하게 만듭니다. 상이용사처럼 국가를 위해 상해를 입은 것도 아니고, 존경과 대우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상황은 모든 희망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특히 성경 시대에는 그들의 신앙적 고정관념 때문에 장애를 죄와 연결하여 정죄하는 2차 가해를 가했습니다. 잘못된 신학, 잘못된 신앙이 이렇게 위험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을 인간의 행위에 따른 인과론적 결과로 해석하는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이 사람을 보면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얼마나 잔인한 질문입니까? 도와줄 생각은 못 할망정, 이 사람의 힘든 모습을 보면서 부모 죄 때문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는지, 본인 죄 때문에 장애를 갖게 된 것인지 논쟁을 하다가 예수님께 질문을 하여 누군가를 죄인으로 낙인찍으려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고난에는 의미를 부여합니다. 분명히 자신이 잘못하고 미숙하고 실수해서 어려움을 당하는데도, 세상이 나를 몰라준다고 하면서 억울하게 여기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고난에 대해서는 뭔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답변은 전혀 달랐습니다. 누구의 죄 때문이라고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보셨습니다. 이 사람의 고난은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보는 차원이 다릅니다. 접근하는 수가 다릅니다.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십니다. 문제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지 않고, 미래지향적으로 보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엄청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눈에 진흙을 이겨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했을 때, 이 사람의 눈이 밝아져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로 인해 자신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실패와 나의 인생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