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명령 중 가장 순종하기 힘든 명령은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것이 아닐까요? 아무리 원수라도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용서할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 밀양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피해자에게 진정한 사죄없이 셀프용서로 죄에서 자유함을 얻는다거나, 반복적으로, 혹은 고의로 같은 잘못으로 피해를 줄 때, 그들을 언제까지 용서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어렵게 용서하기로 다짐하고 다가서다가도 변하지 못하고, 다시 발톱을 드러낼 때, 언제까지 용서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용서와 화해를 실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십자가가 용서와 화해의 상징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약속도, 소망도 없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화평을 이루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을 자를 보며 그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용서는 십자가의 고통, 십자가의 참음과 인내가 동반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보다는 보복과 복수에 이끌리고, 화해보다는 반목과 패거리 문화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는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용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절망을 느끼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은 빌레몬에게 이 힘든 용서를 요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빌레몬에게는 오네시모라는 종이 있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에게 엄청난 경제적 손해를 입히고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로마에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가 감옥에서 바울을 만나 회심을 경험합니다. 전에는 빌레몬에게 무익한 자였지만, 이제는 바울과 빌레몬에게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심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를 곁에 두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오네시모의 과거에 주인 빌레몬에게 피해를 입히고 도망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의 편지를 손에 쥐어 주며 오네시모를 다시 옛 주인 빌레몬에게 보냅니다. 이것이 빌레몬서입니다. 당시 종은 주인의 소유물처럼 여겨졌고, 도망간 종은 주인이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주인에게 큰 손해를 입히고 도망갔던 오네시모가 다시 주인을 찾아 온다는 것은 주인인 빌레몬이 용서하지 않으면 죽음도 각오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1. 바울이 빌레몬에게 요청한 것은 무엇입니까? 전에 손해를 끼치고 도망간 종 오네시모가 감옥에서 바울을 만나고 변화되었으니 용서하고 형제로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2.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오네시모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빌레몬서에는 결말이 나와 있지 않지만, 빌레몬이 용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바울이 보증하며 철저한 회심과 변화가 전제된 용서입니다.
3.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면 무조건 용서해야 하나요? 무조건적 용서는 악용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상과 피해자에 대한 사죄 없는 왜곡된 회개도 피해야 합니다. 용서는 가해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4. 화해자로서 바울에게 배울 점은 무엇입니까? 오네시모의 용서와 회복을 위해 바울은 기꺼이 오네시모가 끼친 손해를 바울이 재정적 책임까지 지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용서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또한 용서를 요청하는 태도에 빌레몬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