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있는데 차별을 받아 얻지 못한다면 무척 억울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일들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이럴 때, 사람은 몇 가지 반응을 보이 수 있습니다. 차별적 현실에 낙심하여 자포자기하는 것, 왜 나만 차별하느냐고 분노하며 거칠게 항의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차별적인 세상과 나의 상황적 현실을 인정하면서 차별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 이렇게 사람들은 셋 중 하나를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현실 앞에 자신을 비하하며 숨는 것은 가장 쉬운 방법이면서 가장 무능한 방법입니다. 분노하고 비난하며 거칠게 항의하는 것은 순간적으로 기분이 풀리고 속이 시원할지는 모르지만, 이후에는 상황이 개선될 여지를 막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반면 차별적인 비정한 현실을 받아들이며 인정하고 차별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비록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게 되겠지만, 차별적인 현실에서도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런 상황이 등장합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딸을 둔 한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병행 구절인 마태복음 15장에서는 울부짖듯 간청하는 여인의 간구에 예수님은 무시와 무대응으로 일관하십니다. 시끄럽게 여긴 제자들이 저렇게 시끄럽게 소리 지르니 어떻게 해서라도 보내 달라고 간청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너무나 냉담합니다. 정말 이 말을 예수님이 하셨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차별적이고 냉정한 답변입니다. 요즘 같으면 뉴스에 “요즘 인기몰이하고 있는 예수, 두로에서 이방인 차별과 막말 논란”이란 타이틀로 비난받을 수도 있는 말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아무리 비유적인 말씀이라도 사람을 개에 비유한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는 발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차별과 배제의 의도가 아니라, 그녀의 마음 속에 시작된 믿음을 드러내고 확인시키기 위한 의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이 여인은 멋지게 자신의 믿음을 주님 앞에 증명해냈습니다. 예수님의 무시와 거절과 비하적 반응에도 이 여인은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차별 없는 은혜를 구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 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하면서 부스러기 은혜를 구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자비와 긍휼을 얻어낼 수 있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돌아가 보니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은 나갔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의 언어, 믿음의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처음에 그렇게 매정하게 대하셨던 주님이 이 여인의 간구를 들어주신 직접적인 원인은 “이 말을 하였으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언어, 믿음의 고백이 딸을 고치고 살린 것입니다. 믿음은 불의하고 차별적인 현실 앞에 분노하거나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부스러기의 은혜라도 당당히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예외가 되지 않는 은혜의 평등성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방 여인에게 부스러기의 은혜를 주시는 은혜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녀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배척하는 안타까움을 보여주기도 하는 말씀입니다. 부스러기의 은혜가 필요한 자, 자녀의 떡의 권리가 있는 자, 모두 필요한 은혜를 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