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비유는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올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주신 비유입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경건한 유대인이라 생각하여 그런 부류끼리만 교제하려 했는데, 예수님이 세리, 죄인들과 교제하니 불편했던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집 나갔다가 돌아온 탕자, 집 안에 있었지만 아버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집 안의 탕자, 그리고 그 두 아들을 모두 사랑하시는 아버지,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두 아들을 모두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은혜의 관점으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랑이 표현되는 방식은 달랐지만, 서로 다른 두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에는 차이가 없었습니다.
1. 작은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 –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살아계심에도 자기에게 돌아올 몫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살림을 나누어주자마자 둘째 아들은 그것을 현금화하여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낭비하다 다 없애고 말았습니다. 먼 나라라는 표현과 나중에 율법에 부정한 짐승인 돼지를 쳤다는 것으로 보아 공간적으로 멀기도 했지만, 정서적으로, 신앙적으로 멀리 떠나가 버린 것입니다. 가진 것이 다 떨어지고 흉년까지 들어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살기 위해 돼지를 치며 돼지 사료로 연명했지만, 그나마도 먹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제야 정신이 든 아들은 아버지를 생각하고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재산을 요구하고 집을 떠날 때 그를 막지 않았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의 모습과 같습니다. 작은아들에게 아버지는 언제든 풍족한 품이었습니다. 재산만 풍족한 것이 아니라 그 품이 넓어 자신을 품어줄 분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모든 것을 잃고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달려가 그를 끌어안고 입 맞추며 환영하고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주며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도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늘 밖을 바라보고 기다리고 있었기에 멀리서도 아들임을 알아보았고, 언제든 아들이 돌아오면 주려고 옷과 가락지 신발을 준비해 놓았기에 즉시로 그것을 줄 수 있었습니다.
2. 큰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 – 큰 아들은 동생이 돌아와 아버지가 기뻐하여 잔치를 벌인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노하여 그 잔치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동생과 동생을 환대하는 아버지에게 강력한 거절 의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함께 기뻐해주길 바라는 아버지에 대해서도 불만을 터트립니다.
큰아들이 동생의 귀환을 축하하는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을 때, 아버지는 직접 나가 그를 설득했습니다.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가 표현하지 않았지만, 큰아들에 대한 대견함과 애정은 확고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생을 사랑하며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장남 노릇 못하고 속 좁은 맏아들을 아버지는 혼내지 않고 설득하며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기 원했습니다.
이 비유는 지식 전달이 목적이 아닙니다. 비유를 통해 그 주인공이 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적용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우리는 믿기 전, 그리고 믿음이 연약할 때, 작은아들, 탕자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큰아들, 집안의 탕자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차별없이, 그리고 변함없이 사랑해주십니다. 그 은혜로 우리는 살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