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빠르다는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식상할 정도로 우리는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벌써 11월도 1/3이 지나갔습니다. 만추의 정취도 아차 하는 순간에 지나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엊그제는 입동이었습니다. 다음 주는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그래서 이번 주, 다음 주는 은혜와 감사에 대해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감사는 은혜를 깨달을 때,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은혜를 입었고, 누리고 있어도, 그것이 은혜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는 감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 살아가고 있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숨 쉬고 있음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카일 아이들먼 (Kyle Idleman)은 그의 저서 『은혜가 더 크다(Grace is greater)』라는 책에서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것을 권유합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단어이지만 처음 보는 단어처럼 다시 생각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실패와 아픔과 수치와 분노와 절망의 환경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 이 모든 것보다 은혜가 더 크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은혜의 거대함과 그것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놀라울 정도로 엄청난 것입니다. 이 말은 반대로 말하면 은혜를 잃어버릴 때, 우리에게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은혜는 설명할 때 흥미롭지만, 경험할 때 강력하게 역사합니다. 은혜는 설명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경험하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은혜는 우리의 죄책감을 없애고, 수치심을 덮을 만큼 크고 강력합니다. 은혜는 관계를 치유할 만큼 실제적이고 연약함을 붙잡아줄 만큼 강합니다. 은혜는 응어리를 풀어줄 만큼 감미롭고, 실망을 바꾸어 만족을 주며, 상심을 만회하게 합니다. “은혜가 더 큽니다(Grace is greater)” 우리의 그 어떤 실패와 좌절과 연약함보다 은혜가 더 큽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모든 상황이 안 좋습니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했고,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했습니다. 하나님도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사 근심하실 정도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코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한 마디가 절망스러운 상황의 반전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8절의 원어적 의미는 여호와께서 노아를 은혜의 눈으로 바라보셨다는 의미입니다. 5-7절까지 노아를 제외한 모든 상황과 현실은 여호와께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눈으로 보시면 절망스러운 현실을 초월하게 됩니다. 절망스러운 상황,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구원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홍수 심판 속에서 구원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 가을에 “그러나”의 은혜를 붙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은혜가 더 크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