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용된 유대인들은 10월만 되면 새로운 희망을 품었습니다. 히틀러가 처음 독일 정치가로 등장했을 때 그는 절제하는 신앙 좋은 크리스천으로 소개되었고, 민족을 위해서 결혼도 하지 않은 독신자로 소개되었을 때 많은 교계 지도자들은 그를 지지했었습니다. 그런데 왜 크리스천도 아닌 유대인들이 10월부터 희망을 갖게 되었을까요? 크리스마스 때 특별 사면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10월부터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수용소 안에서의 참혹한 환경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굶주림과 추위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12월이 되면 벽에다 남은 날짜를 세어가면서 하나씩 지워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이런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우리가 이곳을 나갈 날도 며칠 남지 않았어. 조금만 더 잘 견디자고!” 이런 상황이 12월 24일 저녁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아무 소식도 없이 24일 저녁이 지나갑니다. 포로들은 크리스마스 당일인 25일 마지막까지 희망을 걸어봅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의 하루가 다 지나가도 누구도 석방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품었던 희망이 전부 물거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튿날 아침, 수용소 안에서는 놀라운 광경이 벌어집니다. 대략 40여 명이 수용되어있는 모든 방에서 평균 14-16명의 주검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들을 죽인 것은 절망이었습니다. 희망을 품을 때 그들은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살아남았지만, 최후의 희망의 불빛이 꺼졌을 때 그들은 절망했고 죽어갔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왔던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히고, 투옥 기간이 길어지자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풀려날 것이라는 소망이 흔들렸습니다. 그는 실망하기 전에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물어보고 오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서를 인용하며 간접적으로 세례 요한이 증언하고 기다렸던 이가 자신이라는 것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 11:6)”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고 난 후에 예수님은 남아 있는 무리들에게 세례요한에 대해 변론해 주십니다. 세례 요한이 비로 감옥에 갇힌 특수한 극한 상황에서 잠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세례 요한은 자기 시대에 가장 훌륭하게 자기 사명을 잘 감당한 선지자임을 증언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하면서 우리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소망을 거두고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다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기준으로 예수님을 판단하지 말고,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 모습에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고, 질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고, 소망을 주시며, 함께하시고, 능력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신앙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