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는 주님을 만난 기억이 있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 역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인생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마태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게 된 장면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마태는 가버나움 지역의 세리였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부에 위치한 마을로, 갈릴리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에 대한 세금을 징수하고, 북쪽 시리아에서 입국하는 상인들에게 관세를 징수하는 세관이 있었던 곳입니다.
당시 세리들은 유대인들에게 세 가지 이유에서 죄인 취급 당하며 멸시당했습니다. 하나는 당시 유대가 로마의 속국이 되어 가면서 거둔 세금을 로마에 상납했기 때문에 매국노처럼 인식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정해진 세율대로 세금을 징수하지 않고, 부정한 방식으로 과도하게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세 번째로 세리는 특성상 이방인과 죄인들이 포함된 불특정 다수들과 접촉해야 하므로 율법적으로 부정한 상태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성전에 출입하지 못하게 했고, 세리가 성전에 바치는 헌금은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유대 사회에서 세리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소외감을 느끼고 내면적으로 죄책감에 시달리는 삶이겠습니까? 세리들을 보상해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율배반적인 삶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마태의 집에 가서 함께 음식을 나누며, 동석했던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도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이러한 행보는 바리새인들의 공격받을 것이 뻔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바리새인들은 차마 예수님께 직접 말씀드리지는 못하고 제자들에게 시비를 겁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들으시고 대답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그러면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세리 마태의 관점에서 보느냐, 바리새인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바리새인의 관점에서 보면 접촉을 피해야 할 죄인들과 접촉하여 정결함을 더럽히는 율법을 범하는 사건으로 보일 것이고, 세리 마태의 관점에서 보면 상종하지 않으려 하는 자신을 찾아오신 은혜로 여겨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본문을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읽으십니까? 아니면 세리의 입장에서 읽으십니까?
마태는 자신의 이야기를 상당히 절제해서 표현하고 있지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그동안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며 오직 돈으로 보상받으려 악착같이 살며 내적 갈등을 겪었던 그가 예수님의 방문과 부르심, 그리고 자신의 집으로 오셔서 함께하심을 통해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교회는 의인들의 놀이터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들과 교제하면 비난받고 공격당할 것을 아시면서도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죄인을 낙인찍어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되어야 할 병든 자로 보셨습니다. 우리도 세리 마태와 같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필요한 자들이고, 예수님이 고쳐주셔야 할 죄인입니다. 오늘 나의 모습에서 주님이 고쳐주셔야 할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