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은 모든 것이 밥으로 통한다”는 글이 있습니다. 고마울 때 “야~ 진짜 고맙다. 나중에 밥 한번 먹자”, 안부 물을 때 “밥은 먹고 지내냐?”, 아픈 이에게는 “밥은 꼭 챙겨 먹어”, 재수 없을 때 “쟤 진짜 밥맛 없어” 한심할 때, “저래서 밥은 벌어먹겠냐?”, 잘해야 할 때 “사람이 밥값은 해야지”, 심각한 상황일 때 “넌 목구멍에 밥이 넘어가냐?”, 무슨 일을 말릴 때 “그게 밥 먹여주냐?”, 비꼴 때 “밥만 잘 처먹더라”, 최고의 힘 “밥심”, 좋은 사람 “밥 잘 사는 사람”, 나쁜 사람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놈”, 좋은 아내 평가 기준 “밥은 잘 차려주냐?”
한국사람이나 유대인들은 식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식사는 단순히 끼니를 때우는 것이 아니라 식사를 통해 많은 교제와 교류가 일어납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는 교제 이상으로 특별한 의미가 되는 식사가 있습니다. 식사를 통해 중요한 의미를 기억하고 기억을 촉구하는 의식으로 승화하고, 심지어 과거에 일회적으로 일어난 사건을 현재화하여 반복적으로 재현하는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식사가 유월절 만찬과 주님이 제정하신 성만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유월절 절기에 맞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양 잡는 날 유월절 식사를 하며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당일에도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식사를 할 장소나 음식이나 방법에 대해 아무런 말씀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제자들은 뭘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물을 때, 주님은 저들이 상상하지 못한 것을 준비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유월절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일러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일러주신 대로 성내로 들어가 유월절을 준비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대로 작은 ‘객실’을 구했지만,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구하게 됩니다. 유월절에는 구운 양고기와 무교병, 그리고 쓴 나물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준비하신 음식은 떡과 포도주였습니다.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이것이 제자들에게 주시는 자신의 몸과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몸은 밥을 먹고 밥심으로 살고 밥이 보약이라고 하지만, 우리 심령은 예수님을 먹고 예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힘으로 살아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려 했지만, 주님은 구약의 유월절을 끝낼, 더 이상 유월절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될 성만찬을 준비하셔서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는 것은 이 피를 마시는 자에게 주님께서 피의 언약을 지키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찢기실 살과 흘리실 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에게는 주님도 생명 걸고 피로 구원을 약속해 주시겠다는 것이 성만찬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찬식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성찬을 통해 십자가의 은혜가 과거의 사건으로 기억 속에 회상되는 것만이 아니라, 그 현장에서 다시 현재화되어 재현됩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진부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십자가의 의미를 충분히 알아서가 아니라, 도리어 완전히 무지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언제 십자가를 기억하고, 언제 성찬을 대해도 그 의미가 진부하게 느껴질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