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과 열정은 인생을 사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한자를 보면 열심(熱心)은 뜨거운 마음이고 열정(熱情)은 뜨거운 감정입니다. 열이 오르면 수증기가 생기고, 공기가 팽창해서 뚜껑을 밀어 올리는 폭발력이 생깁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성취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열심과 열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열심과 열정은 파탄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잘못된 자녀 사랑의 열정, 잘못된 관심과 사랑의 표현인 스토커, 욕망을 좇아가는 열정, 잘못된 신념과 이념을 좇는 열심은 열심이 특심인만큼 더 빨리, 더 많이, 더 심하게 무너지게 만듭니다.
이러한 현상은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앙에 열심과 열정이 없는 것도 문제이지만, 잘못된 열심과 열정은 더 큰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은 대부분 열심과 열정이 있습니다. 문제는 잘못된 열심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단에 빠지지 않더라도 율법주의라는 잘못된 열심에 빠져 복음이 주는 자유함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도바울 역시 이런 잘못된 열심에 빠져 고통된 시간을 보냈고,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야 참된 자유함과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바울은 자신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동족 유대인들을 향한 강한 연민과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마음을 기록한 것이 로마서 9-11장의 내용입니다. 9장에서도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 그리고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가 있다고 하면서 그것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왜 형제, 골육의 친척으로 여기는 동족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할까? 여기에 대한 자서전적 고백으로 이어지는 설명이 오늘 본문입니다.
바울이 깨달은 유대인들의 문제는 열심이 아니라 지나치고 잘못된 열심이었습니다. 그들의 열심이 잘못된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썼다는 것입니다. 지식이 없는 열심은 방향성을 상실한 열심입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은 간 것만큼 돌아와야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무분별한 열심은 나중에 누군가가 수습해야 하는 골치가 됩니다. 또한, 지나친 열심은 자기 의를 세우려는 욕심이 생깁니다. 열심은 반드시 보상을 바랍니다. 그 보상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과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열심히 한 만큼 인정받고 보상받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낙심하고 상처를 받게 됩니다. 자기 의를 세우는 자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의가 가려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구원이라함은 나 스스로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구원이라 하지 않습니다. 자기 성취이고 노력이고 능력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자기 의를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울이 깨달은 해답은 열심보다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열심은 구원으로 가는 길에 방해가 되지만, 온전한 믿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우리를 살립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잘못된 열심이 아니라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