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인 줄 알았는데, 지나고 나면 ‘그때 왜 그렇게 했지? 그때는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그때 만약에 이렇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렇게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 정부와 교계의 기싸움이 팽팽합니다. 정부는 선거를 앞두고 빠르고 완벽한 방역의 결과로 덕을 보려는 듯합니다. 그래서 서두르고 사전조율 없이 과격한 용어가 사용되고 불필요한 오해와 잡음을 만들어 낸 것이 사실입니다. 선제적으로 알아서 온라인예배로 전환하고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리며 협조하는 교회의 선의가 짓밟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억울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정부가 교회를 무시한다. 종교의 자유를 간섭하고 기독교를 억압한다’고 하면서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면서 할 소리는 해야 한다며 사이다 발언을 하는 것들을 통쾌해하며 유행처럼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우리가 쌓은 성안에 갇히면 안 됩니다. 예배가 중요하지만, 선교도 중요합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원하는 것은 아버지 집을 지키고 종처럼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니라, 집 나간 동생 찾아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시대의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의 입장이 아니라 우리를 보내신 세상의 관점에서 그들의 상식에서, 선교적 관점에서 접근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고 자기 이권을 챙기는 사람에게는 감동받지 못합니다. 이런 태도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변화시키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위기는 기회라고 이야기합니다. 위기는 우리의 진가를 보여줄 절호의 기회입니다. 어둠은 빛의 진가를 드러내고, 고통스러운 상황은 선행의 진가를 드러낼 기회입니다. 이렇게 기회를 놓치면 실기(失期), 잡으면 호기(好機)가 됩니다. 우리가 목소리를 높이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 때, 도리어 섬기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교회를 다시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때로 부당한 처우를 당했을 때, 강하게 나가서 내 권리를 찾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세상이 이런 모습을 볼 때, 자기 권리 주장하기 위해 땡깡 부린다고 여긴다면 우리는 비본질적인 것을 얻고 본질을 잃는 것일 수 있습니다.
만약에 이번 주에도 구청이나 시에서 예배를 점검하기 위해 공무원이 온다면 예수님이 그분의 모습으로 온 것처럼 대하면 어떨까 합니다. 그분들은 오고 싶어서 오겠습니까? 주일에 쉬지도 못하고 다니고 싶겠습니까? 혹시 종교가 없거나 다른 사람이라면 더더욱 교회에 오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교회에서 딱딱하게 대하고 불쾌함을 느끼도록 대한다면 그들이 교회를 어떻게 볼까요? 만약에 위에서는 상황을 사진으로 남겨오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교회에서 종교탄압이라고 못하게 막는다면 그분들은 얼마나 난감할까요?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분들이 오셨을 때, 얼마나 수고가 많으시냐고, 쉬는 날에도 이렇게 우리 교회를 위해 와주셨으니 감사하다고 인사한다면 어떨까요? 우리가 방역에 최선을 다하고, 협조하는 대로 했지만 혹시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알려달라고 부탁조로 이야기하면 어떨까요? 사진도 찍고, 예배도 참관하고, 필요한 부분 다 하시라고 이야기하고, 교회에서 코로나 극복을 위해 도울 일이 있냐고 물어봐 주면 어떨까요? 가실 때 작은 간식 팩이라도 준비했다가 드리며 다음 주에 또 오시라고 인사해서 보내면 어떨까요? 밖에 나가서 전도는 못하더라도 찾아온 분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