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지내는 목사님 중에 미국에서 목회하시는 분이 한국에 나오셔서 만났습니다. 건강에 이상이 생겨 치료할 방법을 찾느라 기한을 여유 있게 잡고 나왔습니다. 주일이 되면 오랜만에 한국의 여러 교회들을 다니며 설교자나 예배인도자가 아닌 예배자로 예배드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느낀 점을 이야기했습니다. 약 20년 전 한국을 떠날 때, 한국 교회의 예배와 달라진 가장 큰 차이점은 요즘 한국 교회 성도님들은 찬양 시간에 찬양을 잘 부르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이 목사님의 느낌이 맞을겁니다. 우리는 서서히 변해왔기에 우리 자신이 어떻게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랜만에 와서 보고 옛날과 비교하며 느낀 것이라면 정확한 평가일 것입니다. 만약에 그분이 우리 교회 예배에 참석하신다면 뭐라고 할까 살짝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목사님의 평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께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당시 유다 백성들은 예배에 열심이었습니다. 무수한 제물,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11절), 헛된 제물, 분향,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 성회(13절), 월삭과 정한 절기(14절)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저들이 얼마나 제사와 예배와 모임에 열심을 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평가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저들을 소돔의 관원, 고모라의 백성(10절)이라고 부르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으로 심판받아 멸망한 대표적인 도시입니다. 외형적인 열심은 문제의 본질을 가려서 보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제사에 열심을 내는 것으로 저들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골적으로 저들의 예배를 불쾌해하십니다. 그리고 직설적으로 거절의 의사를 밝히십니다. 그 어떠한 시도나 노력도 무의미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예배는 하나님께 기쁨이 아니라 부담과 무거운 짐이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예배에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 어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도, 어떤 기도를 드려도 눈을 가리고 듣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두려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예배하는 자리에 나와 앉아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교회 마당만 밟을 뿐이고, 하나님께 무거운 짐이 될 뿐이라고 하신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형식으로는 제사와 예배에 열심 있는 모습이지만, 삶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살지 않는 위선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제의와 윤리의 균형이 맞는 신실한 예배를 원하십니다. 예배와 삶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배가 진실하지 못하면 삶이 올바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삶이 올바르지 못한 자의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라고 하시면서 우리의 예배를 함께 평가하고 진단해 보자고 초대하십니다. 내 치부를 드러내며 부족하고 잘못된 것을 고치자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수술대에 누운 환자가 자신의 몸을 의사에게 맡기며 몸속 깊은 곳까지 드러내어 수술하듯 우리의 예배를 진단하자고 하십니다. 나의 예배는 하나님께 어떤 의미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