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 실린 시들은 별로 문학적 감동이 없는데, 마음에 남는 시가 하나 있습니다. 김춘수님의 꽃이라는 시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의미)가 되고 싶다.” 이 시에서 우리는 몸짓이 꽃으로, 꽃이 눈짓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의미 없는 나에게 내 이름이 불려지고 누군가의 꽃이 될 때, 의미가 부여된다는 내용을 통해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인정받고 싶은 소망을 노래한 시입니다.
우리는 관계성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존재입니다. 나 혼자 덩그라니 있을 때, 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역시 사람은 관계성 속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자녀로, 친구로, 부모로, 선후배로, 동료로, 동역자로, 함께한 시간과 추억이 나라는 존재에 의미를 부여해줍니다. 그러나 사람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내 인생의 진짜 의미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발전하고, 완성됩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의 삶은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부르심 이전과 부르심 이후로 확연히 구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모르고 의미없이 살던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던 인생이,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으로 부르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새롭게 태어나고, 부르심에 응답하며 서로에게 잊혀지지 않는 의미로 새겨질 때, 그 인생은 참으로 가치있고 복된 인생이 됩니다. 예레미야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그의 인생에 의미가 더해집니다. 예레미야가 부르심을 받는 모습을 통해 우리를 부르시는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 우리는 우연히, 어쩌다, 혹은 저절로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태에서 짓기 이전부터 알고 계셨고, 배에서 나오기 전에 성별하였고,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다(5절)고 말씀하십니다. 찾아오셔서 말씀하시고 부르심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은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2) 의미를 알지 못하면 부르심은 두렵게 느껴집니다. - 선지자로 세웠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예레미야의 반응은 슬프다는 것과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아이라고 표현한 것은 나이가 어리다고 볼 수도 있지만, 아직 전하는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모세도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출 4:10)라고 했고,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출 4:13)라며 사양하기도 했습니다. 기드온도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삿 6:15)”라고 사양했습니다. 그리고 부르심이 확실하다면 확실한 표징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3) 하나님이 부르실 때는 함께하시고 능력도 주십니다. - 두려워하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고,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다고 하십니다. 선지자의 사명은 자신의 지식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을 대신하여 선포하고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의미입니까? 나를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꽃으로 불러주신대로 살고 있습니까?